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전쟁의 전개 (문단 편집) ==== 기갑 ==== 국군에게는 전차나 자주포는 한대도 없었다. 미국은 한반도 대부분을 산과 논이 차지해 전차 기동이 어렵다는 이유와 북침 같은 허튼 생각이 들지 않도록 전차지원을 거부했다. 이런 생각 자체는 북쪽의 소련군사고문단도 한반도의 지형이 전차나 자주포 운용이 어렵다고 판단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지만 소련군사고문단은 북한군에게 줄 전차 지원량을 요청 수량의 절반으로 조정해서 지급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판단보다 제대로 된 판단을 했다. 하지만 미국도 장기적으로는 한국군 내부에 기갑부대를 만들 필요 자체는 인식하고 있었고 그 토대를 위해 전차를 대신할 장갑차인 [[M8 그레이하운드]] 27대와 [[M3 하프트랙]] 20여대만 지원해 이 장비들과 군견, 그리고 군마들을 합쳐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독립기갑연대]]를 겨우 구성했다. [[M8 그레이하운드]]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 미군이 위력정찰용 장갑차로 운용했는데 37mm 대전차포와 기관총 2정을 장비해 장갑차치고는 화력이 강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장갑차로서는 괜찮지만 전차를 맞상대하기에는 화력과 방어력의 부족으로 불가능했다. 애초에 37mm 대전차포는 이미 [[제2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중형 전차 이상의 상대에게는 화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확인된 무기체계다. 즉, 그레이하운드는 동급 장갑차는 잘 잡아도 본격적인 전차 상대로는 무기력했다. 방어력도 [[정찰 장갑차]]라 소총탄을 간신히 막을 수준이었으니 대기갑전용으로는 부적당했다. 애당초 이 장갑차는 정찰용이고, 잘 쳐줘도 게릴라전이나 후방 화력지원용이었다. 게다가 분류상 [[병력수송장갑차]]도 아닌 정찰 장갑차인지라 병력을 싣고 다니면서 [[기계화보병]]처럼 사용할 수도 없는 차량이었다. 미국이 이 장갑차를 넘겨준 건 장기적으로 보면 한국에 기갑부대 창설이 필요하기는 한데 전차나 자주포는 앞서말한 이유로 시기상조여서 운용방식이 전차와 비슷한 이 장갑차를 지원한 것이다. 육군본부도 그레이하운드를 대전차용으로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당시엔 통신기술이 낙후된 탓에 어느 부대가 살아남았고 어느 부대가 전선을 버티고있는지 서로 전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당시 기준으로 매우 뛰어난 통신성능을 가진 M8 그레이하운드를 주요 전방부대로 보내 통신을 할 의도였다. 하지만 전선의 장교들은 몰려오는 [[T-34-85|T-34]]에 대적하기 위해서 이 장갑차로 싸우라고 지시했고 T-34와 맞상대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지만 현지 그레이하운드 지휘관들은 '만약 자신들이 후퇴한다면 병력들의 사기가 더 곤두박질칠 것이다'라고 생각해 [[전사(죽음)|어떻게 될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전투를 강행했다. 주 전술은 그레이하운드 1대가 유인하고, 매복해 있던 또 다른 1대가 무한궤도를 사격하는 것으로 실제 적 전차를 돈좌시키고 전차병까지 사살해 전투불능으로 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태생이 장갑차인 데다가 화력도 주력 중형전차를 상대하기엔 이미 2차 세계대전 때부터 무력한 게 밝혀졌고, 수적 열세가 너무 큰지라 결국 [[흥남 철수]]에서 파괴된 1대를 마지막으로 독립기갑연대 직속의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는 사실상 전멸했다. 다만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레이하운드의 모형에 기재되어 있는 설명에는 1950년대 말까지는 한국군이 그레이하운드를 운용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최근 건군기와 6.25 전쟁, 월남전 등 국군사를 다루는 블로거 오로라의 의견으론 북진 당시 그레이하운드가 전부 기갑연대에 있던 것이 아니라 몇 대씩 타 사단에 배속되었던 것과 1.4 후퇴 이후 극히 소량의 생존 차량들의 대한 처분 문제를 다룬 문서가 있다는 점을 들어 살아남은 차량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2198737461|예시]] [[M3 하프트랙]]도 기관총 1정이 무장의 전부고 20명의 병력을 '''험지로 옮길 수 있는''' 장점을 제외하면 특별할 건 없다. 결국 개전 초기에 별다른 성과없이 상당량의 기갑 장비를 상실한 한국군은 전쟁 중반 이후에 미국이 미군 전차부대를 지원해주기 시작하고 공여받은 전차로 자체적인 기갑부대를 만들기 시작한 후에야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